-유전자 검사와 우생학
1960년대에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한 세포유전학은 염색체분석기법을 통해 임신 중 태아의 유전자를 검사하는 방법의 기초를 놓았다. 최초의 산전유전자검사법인 양수 검사법은 1960년대에 개발되어 1970년대 중반에는 광범위하게 확산한다. 이와 함께 1967년 영국에서 그리고 1973년 미국에서 합법화되기 시작한 임신중절은 산전 유전자 검사에 이은 낙태라고 하는 새로운 유전질환 대책을 정착시켰다. 최근 기술의 진보로 배아 단계에서의 유전자 검사가 가능해짐에 따라 산전 유전자 검사는 태아 선별법과 배아 선별법으로 세분되었다. 태아 선별은 예를 들어 양수검사법에 의해 태아의 유전자를 검사한 후 문제가 발견되었을 경우 태아를 낙태하는 방법이다. 배아 선별의 경우 개략적인 원리는 다음과 같다. 심각한 유전질환의 가능성이 있는 부부가 아기를 낳기를 원하는 경우 여성 쪽으로부터 체외수정(IVF) 기술을 적용해 여러 개의 난모세포를 추출한다. 여기에 남편의 정자를 수정시켜 체외에서 여러 개의 배아를 만든다. 이 배아의 유전자를 검사해 정상적인 배아만 여자의 자궁에 착상하여 임신에 이르게 한다. 배아 선별법은 태아 선별법과 달리 태아를 낙태시켜야 하는 부담으로부터 해방되는 장점이 있지만 복잡한 체외수정과 검사에 따르는 번거로움 그리고 고비용이라는 단점이 있다. 배아 선별법은 특히 여러 개의 배아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인해 심각한 유전질환을 가진 부부에게 주목받게 될 생식 보조 기술로 보인다. 태아와 배아 선별법의 윤리적 문제는 대략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이들 방법은 태아와 배아를 조작하고 폐기하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 경우 태아와 배아의 생명의 지위에 관한 문제가 첫 번째 이슈로 떠오른다. 두 번째 문제는 태아와 배아를 폐기하고 선택하는 행위가 가진 우생학적 함의인데 여기서는 이 문제만 논의하기로 하자. 태아와 배아를 폐기할 경우 이는 소극적 우생학이며, 여러 배아 중 원하는 배아를 선택한다면 이는 적극적 우생학 행위라고 해석할 수 있다. 심각한 유전질환의 경우 결함 유전자를 지닌 태아나 배아를 낙태, 폐기하는 행위는 그 질환의 심각성이 낙태나 폐기에 따른 윤리적 부담을 상쇄할 수 있다. 문제는 페닐케톤요증 등의 치료 가능한 유전질환 또는 고지방이나 고혈압 등 치명적이지는 않은 질병을 유발할 유전인자가 검출된 경우이다. 태아의 경우 이러한 질환은 낙태에 따른 윤리적인 부담을 상쇄할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배아 선택의 경우 역시 이러한 질환을 피하기 위해 힘든 체외수정 과정과 고비용을 감수할 부부는 흔치 않을 것이다. 다만 다른 심각한 유전질환을 피하기 위해 배아 선택을 하는 경우 여러 배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이때 비치명적 질환이 이차적인 요소로 감안될 수는 있을 것이다.
-유전자치료와 우생학
인간의 유전 특질에 대한 인위적 개입은 대상 체세포 유전자 또는 생식세포 유전자와 목적치료 또는 특질 강화에 따라 이들의 조합인 네 가지 경우로 나뉜다. 체세포 유전자조작은 치료 또는 특질을 강화할 목적으로 환자의 결함 체세포 유전자를 다른 정상 또는 우수한 특질의 유전자로 대체하는 것이며 치료 효과는 환자의 당대에 국한된다. 생식세포 유전자조작은 치료 또는 특질 강화를 목적으로 정자, 난자 또는 배아 상태에서 결함 유전자를 정상 또는 우수한 유전자로 대체하는 것이며 배아가 성인으로 자라 후손을 낳게 되면 후대에까지 그 영향이 항구적으로 미친다.
인간 유전자 조작의 가능성에 대한 이론적 논의는 1962년 "인간과 그의 미래"라는 주제로 런던에서 개최되었던 CIBA 재단 심포지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에 참여했던 당대의 대표적 생물학자인 홀대인, 헉슬리, 뮐러 등은 인간의 유전 특질을 개선하는 방법으로 우수한 정자의 기증, 우수한 인간의 복제와 아울러 유전자에 대한 직접적 조작을 제시했다. 이들은 생식세포 유전자를 조작하는 것이 체세포의 경우보다 힘들며 치료보다는 특질 강화가 더 어려운 작업일 것으로 이미 예견했다. 1960년대 말 경 분자생물학의 발전은 유전자조작의 가능성을 보다 현실화시켰으며 이에 대한 윤리적 논의가 가열된다. 인간 유전자조작에 대한 윤리적 논의는 1979년 주최한 국제회의가 분수령을 이룬다. 이 회의에서 WCC는 유전질환의 치료를 위한 체세포 유전자치료만 윤리적으로 용납될 수 있으며 질병의 예방 또는 치료를 위한 생식세포 유전자치료 그리고 인간의 능력을 강화하는 어떠한 유전자조작도 윤리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는 내용의 권고안을 채택했다. 이 권고안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광범위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덴마크, 스웨덴 등 서구 여러 나라는 이 권고안에 기초해 체세포 유전자치료만 윤리적으로 용납될 수 있다는 입장의 정책선언문을 발표한다. 이러한 부분적 허용에 따라 1980년대 중반 이후 체세포 유전자 치료법에 대한 수많은 임상실험이 수행되고 이를 위한 국제적 가이드라인도 마련된다. 이와 아울러 금기시된 생식세포 유전자 치료법에 대한 활발한 논의도 일어난다.
체세포 유전자치료에 대한 윤리적 논의는 새로운 치료법이 가질 수 있는 장점과 위험부담, 임상실험에서 대상 환자의 자발적 동의의 획득, 비밀의 유지 등 전통적인 이슈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생식세포 유전자치료의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한데 가장 우려되는 요소는 생식세포 유전자조작의 결과에 대한 과학적 불확실성이다. 헌팅턴씨병과 같이 하나의 유전자에 결함이 생길 때 발생하는 질환도 있지만 대부분의 유전질환이나 특질들은 다수의 유전자의 복합적 작용에 의해 결과된다. 조작된 유전자와 주변 유전자 간의 복합적 작용이 배아의 장기적인 성장 과정에서 어떤 위험요인으로 등장하게 될지 현 단계의 지식수준으로는 예측 불가능하다. 이러한 과학적 불확실성이 허용 가능 수준으로 감소하지 않는 한 생식세포 유전자치료는 도덕적으로 무책임한 개입이 될 것이다. 생식세포 유전자치료에 대한 투자가 결코 효율적이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구태여 결함이 있는 배아를 치료하기보다는 정상적인 배아를 선택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생식세포 유전자치료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런 선택적 방법은 결함 유전자를 걸러내는 우생학적 접근이며 결함 유전자를 직접 치료하는 방법이 훨씬 윤리적으로 평등한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비판자들은 사회적으로 우려할 결과를 낳는 것은 오히려 유전자치료라고 반박한다. 이는 유전 특질을 강화하는 우생학적 오용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유전자치료가 과연 우생학의 일종인가?" 의료윤리학자 해리스는 최근 한 논문에서 직설적으로 묻고 있다. 해리스의 입장은 다소 극단적인데 체세포나 생식세포 유전자 치료는 과학적 불확실성만 제거된다면 양자 간에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고 본다. 치료적 유전자 조작이나 특질 강화를 목적으로 한 (우생학적) 유전자조작 역시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고 본다. 치료의 조작이나 우생학적인 조작 모두 개인의 생존과 건강을 보호하는 방법의 하나로 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대상 유전자의 종류(체세포 또는 생식세포 유전자)나 조작의 목적(치료 또는 특질 강화)에 관계없이 이러한 조작은 모두 개인의 생존과 보호라는 보편적 가치 아래 용인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의료윤리학자 니콜라스 아가도 유전자 조작을 통한 특질 강화에 대해 전향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아가는 인간유전 자조적 문제에 대해 기존의 이분법적 윤리적 접근 치료적 조작 대 우생학적 조작은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특질을 개선하는 어떠한 유전자조작도 일률적으로 거부하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맞춤 아기: 인간 유전자를 조작하면서 윤리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방식들"이란 논문에서 아가는 윤리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유전자 특질 강화도 있다고 주장한다. 아가는 개체의 발전에 환경과 유전자가 동시에 영향을 미친다고 전제하고 유전자 개량은 환경 개량과 동일선상에서 취급될 수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자녀의 성장에 큰 영향을 끼치는 환경을 개선하는 일에 부모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허용되듯 부모가 유전자조작을 통해 자녀의 선천적 능력의 용량을 증강하는 일에 개입하는 행위도 윤리적으로 허용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질 강화 유전자조작에 많은 사람이 반대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불평등의 심화이다. 이들은 부의 편재와 같은 환경적 불평등에 유전적 불평등이 더해질 경우 전체적 불평등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화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유전자조작은 부자들만이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고비용의 서비스가 될 것인데 유전자조작에 의한 차별적 능력 강화는 기존의 사회 불평등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아가는 환경과 유전 양자를 동일한 종류의 문제로 파악하고 부의 편재와 같은 환경적 불평등 문제를 다루는 기존의 윤리적 방식을 동일하게 적용하여 유전적 불평등 문제를 다루면 될 것이라고 제안한다. 이에 더해 아가는 총체적 유해성 개념을 적용하여 특정 유전자조작의 용납 여부는 그 조작의 사회적 개인적 측면의 총체적 평가 결과에 따라서 판단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예를 들어 교육 환경의 경우 일본의 과외는 의무교육과 같이 그 사회가 꼭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윤리적으로 이를 금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도덕적으로 요구되지 않는 행위가 곧 도덕적으로 허용 불가능한 (금지되어야 할) 행위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 더 좋은 학습 환경을 자녀에게 제공해 주는 과외가 도덕적으로 허용 불가능한 행위가 아니라면 이와 유사하게 자녀에게 더 좋은 유전적 특질을 제공해 주는 것도 도덕적으로 허용 불가능한 행위가 아니라고 아가는 추론한다.
아가는 여기에서 기본적으로 과외가 그 총체적 효과로 볼 때 유해한 행위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는 한국 상황에서 매우 흥미로운 이슈인데, 2000년 5월 한국 대법원은 과외를 합헌적인 행위로 판시했다. 과외를 포함한 제반 교육에 대한 자유는 개인의 침해할 수 없는 기본권으로 해석되어 합헌적 행위로 인정된 것이다. 이 판결을 둘러싸고 과외 허용에 대한 열띤 찬반 논쟁이 벌어졌는데 가장 치열한 논점은 과외가 심리적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한다는 불평등에 관한 문제였다. 이러한 시각에서 과외 문제를 접근한다면 과외 허용 여부는 궁극적으로 불평등의 수용에 대한 그 사회의 가치판단에 달린 문제라고 보인다. 평등보다는 개인의 자유에 보다 큰 가치를 부여하고 그에 따른 불평등을 수용하는 사회에서는 불평등의 심화를 감수하고서라도 개인의 자유를 허용할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개입을 통한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이러한 행위가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행위이며 따라서 총체적 유해성 측면에서 도덕적으로 용납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개인의 특질을 강화하는 유전자조작의 도덕적 허용 여부 역시 이러한 조작이 결과하는 불평등을 그 사회가 어느 정도 용납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환경적 요인과 유전적 요인을 동일선상에서 파악하는 아가의 주장은 결국 부의 불평등을 허용하는 사회는 유전적 불평등도 허용해야 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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