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세계 운동으로서의 우생학

Sunny0923 2023. 2. 20.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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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운동에서도 우생학의 영향을 받았다.
-독일의 우생학
독일의 우생학운동은 인종 위생, 강제 불임, 안락사, 집단학살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전개되었다. 인종 위생 운동은 19세기 말 독일 사회의 급격한 산업화과정에서 파생된 제반 사회문제와 노동자 계층에 비해 엘리트 계층의 출산율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데 대한 사회다윈주의적인 관심에 주된 근거를 두고 있다. 초기의 인종 위생 운동은 생물학에 엄밀한 지적 기반을 두었고 인종적 정치적 색깔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1933년 나치의 집권 이후 인종 위생 운동은 흑인, 유대인, 동부 유럽인들을 인종적으로 구분하고 열등시하는 정치적 운동으로 급속히 변질한다. 1933년, 선천성 정신질환, 조현병, 간질, 선천성 시각장애인, 심한 알코올 중독, 헌팅턴씨병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도입한 강제 불임법을 통과시키며, 이는 1937년 모든 독일 유색 아동을 대상으로 확대해서 낳지 말기까지 약 350,000명 생식능력을 제거했다. 안락사에 관한 독일 사회의 관심은 1895년 《죽을 권리》 출판으로 촉발되었는데, 이 책은 정부가 개인의 죽음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안락사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나섰다. 1920년 출판한 《살 가치가 없는 생명에 대한 살생 허용》에는 나치 체제 아래 우생학운동에서 광범위하게 사용했던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이란 개념이 등장하는데 이 책은 불치병환자뿐만 아니라 정신질환자, 박약아, 선천성 불구아도 이 개념의 범주에 포함했다. 본격적인 안락사 프로그램은 1930년대 말 신체나 정신장애를 지니고 태어난 아동 학살로 시작한다. 초기에는 3살 미만의 아동을 대상으로 하였으나 1941년 17살, 그리고 1943년에는 유대인을 비롯한 이른바 바람직하지 않은 인종의 건강한 아동까지 포함했다. 자국민 불구아동을 대상으로 시작한 안락사 프로그램은 이렇게 그 대상 나이와 종족을 계속 확대해서 결국 타 종족의 건강한 성인을 대상으로 한 집단학살 프로그램으로까지 치닫는다. 독일이 소련과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수많은 유대인, 집시, 정신질환자가 이 프로그램으로 총살당하였고, 결국 강제수용소에서 노동력이 없거나 병들거나 반사회적이라는 이유로 무고한 수백만 인명이 살인 가스로 대량 학살당하는 인류역사상 유례없는 참극이 벌어지게 된다.
1920년대 미국에서 이민제 헌법과 강제 불임법이 통과되자 우생학에 대한 사회학자, 인류학자, 생물학자들의 비판 목소리가 높아갔다. 이들은 범죄, 매춘 등의 사회문제는 가난, 문맹 등과 같은 불리한 사회 여건의 결과이지 유전자의 문제가 아니며, 인종 간의 차이도 생물학적이라기보다는 문화적 차이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0년 로마 가톨릭교회도 교황의 교서를 통해 우생학을 공식적으로 반대한다. 이러한 거센 반대의 결과 구미 대부분의 나라에서 우생학운동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제한받게 되었다. 독일이 유일한 예외인데 1930년대 나치 치하에서 우생학 프로그램은 전성기에 달하며 결국 가스실의 대량 학살로 막을 내린다. 이 참극은 우생학을 추악한 단어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미국의 우생학
우생학이 나타나기 시작한 19세기 말부터 미국은 인종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때부터 많은 흑인을 포함하고 있었던 미국은 19세기 이후에 동, 남부 유럽인과 중국인, 일본인 등의 이민자들을 많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인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영국에서 이주해 온 앵글로·색슨족이었으며, 이들은 다른 인종의 수가 많아지자 서서히 자신들의 정체성을 자각하며 그들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흑인은 물론 중국, 일본인 등의 황인종, 그리고 백인이지만 앵글로·색슨족이 아닌 폴란드, 이탈리아, 그리스인 등은 자신들과 다른 문화와 관습을 가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정신박약, 범죄, 매춘, 알코올 중독 등이 미국 사회 내로 급속히 확산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인종 문제 속에서 자연스럽게 인종주의적 우생학이 나타났으며, 1900년대 루스벨트 대통령은 우생학을 미국 전체로 널리 확산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하버드 대학교 재학시절부터 뿌리가 깊은 인종주의적 편견을 가지고 있던 그는 대통령 취임 후 "미국의 성공은 앵글로·색슨족의 우월한 피 때문이다."라는 식의 발언으로 인종주의를 선전했다. 그리고 루스벨트의 절친한 친구였던 우생학자 그랜트 또한 새로운 이민자들과 미국 앵글로·색슨족의 혼혈은 생물학적 퇴화를 일으킬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며 인종주의적 이론을 퍼뜨리는 것에 일조하였다. 1912년 고더드가 캘리캑가에 대한 연구를 발표하여 우생학의 확산에 영향을 끼친다. 그 후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미국인들은 앵글로 색슨족이 국제적인 대규모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인종의 질을 더욱 향상하게 시켜야 하며 자기 피에 다른 종족의 피가 섞이는 것은 인종의 퇴화를 일으킬 것이라는 생각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미국에서 인종주의적 우생학을 더욱 강화했으며 마침내 1924년에는 이민제 헌법이 통과되었다. 대븐포트 등의 우생학자들은 통계적인 방법을 이용하여 이민자들이 나쁜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의 빠른 수적 증가가 미국 사회에 위협을 가져온다고 주장하면서 이민제한법의 통과에 과학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이 시기 우생학은 가계도 연구, '우생학적으로 뛰어난 가족 선발 대회', 지능 검사들을 통해 더욱 활발히 전파되었으며 각종 대규모 재단의 지원을 받았다. 덕데일, 고더드 등의 우생학자들은 『칼리카크 가족』과 같은 가계도 연구를 통해 범죄, 사기, 매춘, 정신박약 등의 형질이 한 가족 내에서 계속 유전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 연구서들에서는 우생학적으로 열등한 가족과 우월한 가족의 도덕적, 신체적, 인종적 차이가 잘 부각되어 있으며 그러한 차이는 여러 주에서 개최된 우생학적으로 뛰어난 가족 선발 대회의 기준이 되었다. 이와 같은 대중적인 선전과 연구 그리고 대규모 재단의 막강한 금전적인 지원으로 인해 강제적인 불임수술을 허가한 법은 여러 주에서 쉽게 통과되었다. 19세기 미국에서도 영국, 프랑스와 같이 정신 이상자, 실업자, 부랑자들을 수용하는 시설이 존재해 왔으나 우생학적으로 열등하다고 지목된 이민자들을 모두 수용하는 데에는 너무나 큰 비용이 필요로 했다. 따라서 샤프, 옥스너 등의 의사들은 수용소 대신 불임수술이 더 경제적이라고 주장했으며, 실제로도 1907년부터 소수의 수감자는 대상으로 은밀한 불임수술을 시행해 왔다. 이후 1930년대의 대공황기 때 수용소를 운영할 돈이 더욱 부족해지면서 불임수술을 지지하는 여론이 강해졌고 결국 약 30개 주에서 불임수술 법이 통과되었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흑인 지식인들은 유전적 결정론과 백인 중심의 인종주의를 비판했다. 미국 중간계급의 극소수를 점하고 있던 두 보이스, 본드, 존슨 등의 흑인 지식인들은 현재 흑인이 백인보다 여러 방면에서 열등하다는 점을 인정하였지만 유전적으로 결정되었다는 주장은 거부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환경의 개선과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 흑인들의 지적, 도덕적, 신체적 형질들은 개선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라마르크적 우생학을 받아들였다. 흑인 지식인들은 흑인 자신들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중시하여 고다드의 지능 검사 결과를 비판하였고 여러 주에서 흑인과 백인의 결혼이 금지되었을 때도 격렬하게 공격하였다. 이때 그들은 백인과 결혼하여 후손들의 유전적 형질을 향상하길 바란 것이 아니라 그러한 법 자체가 흑인의 존엄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점에 분노하였다. 그들의 반인종주의적 활동이 세계 2차 대전 이후 미국에서 골턴의 우생학이 쇠퇴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보아 흑인 지식인들의 주장은 장기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 효과가 있었다. 물론 독일 나치의 대학살이 우생학의 쇠퇴에 기여를 하였지만 지식인들의 이러한 조직적인 선전은 강제적 불임수술의 폐지에 무시할 수 없는 요소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우생학
일제 강점기에 독일을 유학한 의사 이갑수가 1933년 조선우생협회를 창립하고 독일의 우생학을 여러 차례 소개한다. 1959년, 1964년에는 우생법 제정을 천주교의 반대로 실패를 하있으나, 현재의 모자보건법 14조 1항에는 우생법 항목이 들어가 있다.1941년 치료약의 보급으로 한센병은 피부병으로 분류되었으나 국내에서는 전염병으로 알려지며 환자들은 격리 수용되었다. 전국적으로 한센병 환우들을 대상으로 강제 낙태가 시행되었고, 1992년까지 소록도에서는 한센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강제 불임 시술이 행해졌다. 1996년까지 학술 연구가 아닌 한센병 환자들의 임신을 위협할 목적으로 낙태한 태아 표본들을 소록도 병원의 해부실에 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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