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지그문트 프로이트

Sunny0923 2023. 2. 25.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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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 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이다. 프로이트는 시간 약속 같은 것을 지나칠 정도로 꼼꼼히 챙기는 스타일이었다. 영국제 양모 정장에 옷감은 꼭 아내가 골라준 것을 썼다. 젊은 시절 자존심이 강했던 그는 농담 삼아 "양복장이의 인상이 내게는 담당 교수의 인상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말했을 정도다 프로이트는 무의식과 억압의 방어 기제에 대한 이론, 환자와 정신분석자의 대화 통하여 정신 병리 치료하는 정신분석학적 임상 치료 방식을 창안한 것으로 매우 유명하다. 또 그는 성욕을 인간 생활에서 주요한 동기 부여의 에너지로 새로이 정의하였으며, 치료 관계에서 감정 전이의 이론, 꿈을 통해 '무의식적 욕구'를 관찰하는 등 치료 기법으로도 알려져 있다. 초기 뇌성마비를 연구하기도 하였다. 
프로이트는 법을 공부하기로 했다가 빈 대학교의 의과 대학에 입학하여 다윈주의자였던 카를 클라우스 교수 밑에서 공부하였다. 그가 의대를 택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다윈의 ≪종의 기원≫과 괴테의 ≪자연≫에 대한 독서 때문이었다. 프로이트는 1885년 파리 살페트리에르 병원장 샤르코 밑에서 장학생으로 약 5개월간 연구하면서 히스테리와 최면술에 특히 관심을 가졌는데, 이것은 장차 정신분석학을 창안하는 데 매우 중요한 동기가 된다. 1885년 10월 프로이트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신경학자 장 마르탱 샤르코와 공동 연구차 파리에 갔다. 그는 이때 파리에 체류한 경험이 재정적으로 그리 희망적이지 않은 신경학 연구 대신, 정신 병리 치료로 진로를 선회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하였다. 샤르코는 히스테리와 히스테리 환자의 최면 감수성을 전공하였으며, 그는 청중 앞 무대에서 히스테리 환자를 자주 시연하였다. 하지만 나중에 프로이트는 최면 기법을 더 이상 치료 가능성이 있는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고, 자유 연상과 꿈 분석을 선호하게 된다. 샤르코 자신도 말년에 히스테리에 대한 자신의 연구에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였다. 
1886년에 프로이트는 마르타 베르나이스와 결혼한다. 그 뒤 자기 신경과 진료소를 차린다. 아내의 아버지 베라만은 함부르크의 수석 랍비였던 이작 베르나이스의 아들이었다. 프로이트는 신경계 환자들에게 최면 기법을 실험하였으나 많은 대상자에게 최면이 쓸모없는 것으로 드러나자 이 치료 방식을 포기하였으며, 환자와 본인의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치료법을 썼다. 이 방식은 "대화 치료"로 알려지게 되는데, 대화의 최종적인 목적은 환자가 처음에 거부하고 있으며 무의식에 갇힌 강력한 감정 에너지를 풀어주어 위치 짓는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이렇듯 환자가 어떤 감정을 거부하는 것을 "억압"이라고 불렀으며, 그는 이것이 종종 정신의 정상적인 기능에 해를 끼치며 육체적 기능까지도 저하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를 "정신 신체증"(심신증)이라고 설명하였다. "대화 기법"은 정신 분석학의 기초로 널리 평가받고 있다.
나이 40대에 프로이트는 수많은 심신증 장애와 더불어 죽음에 대한 지나친 공포, 그 밖에 공포증에 시달렸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꿈, 기억 그리고 본인의 인격 발달의 변천에 대해 탐색하는 데 몰두하였다. 이렇게 자신을 분석하면서 프로이트는 1896년에 죽은 자신의 아버지 야콥 프로이트에 대해 적대감을 느꼈으며, 또 어린 시절 매력적이고 따뜻하며 포근했던 어머니 아말리아 프로이트에게 느낀 성적 감정을 상기하였다. 자기 분석을 계속하여 지금까지 수집한 자료들을 모아 1899년 11월, 라이프치히와 비엔나에서 동시에 《꿈의 해석》을 출판했다. 그리고 정신학 분석을 연구하여 빈 정신 분석 학회를 조직했다  1930년, 프로이트는 심리학과 독일어 문학에 기여한 공로로 괴테 상을 받았다. 3년 뒤에 나치가 독일에서 집권하였으며, 이들이 불태우고 없앤 책 가운데서도 프로이트의 책이 특히 두드러졌다. 1938년 3월에 나치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였다. 그리하여 비엔나에서 반유대주의 감정이 들끓었으며, 프로이트와 가족의 집에는 비밀경찰들이 들이닥치기도 하였다. 또 비엔나 정신 분석 학회가 해산당하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책과 재산이 모두 몰수당하자, 프로이트는 "자유롭게 죽기 위하여" 망명길에 오르기로 결심하였다. 그와 가족은 1938년 6월에 비엔나를 떠나 런던 햄프스티드의 메어스필드 가든스로 이주하였다. 스위스 코티지 근처에 벨 사이즈 길과 피츠 존 거리의 한쪽 모퉁이에 그의 동상이 서 있다.
지독한 애연가였던 프로이트는 구강암 때문에 생전에 30번이 넘도록 수술받았다. 1939년 9월에 그는 의사이자 친구인 막스 슈어를 설득하여 자살을 돕도록 하였다. 프로이트는 미완성 원고를 남겨두고 1939년 9월 23일에 죽었으며, 죽은 지 사흘 뒤에 그의 유해는 영국 골더스 그린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반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과학일 수 없다고 보았다. 아돌프 그륀바움은 정신분석학은 반증 가능하며, 사실상 틀렸음이 증명되었다고 주장한다. 비판자들과 옹호자들 간의 논쟁은 때때로 매우 격렬해져서, 이러한 논쟁들은 프로이트 전쟁으로 보였다.
한편 알프레트 아들러 나 칼 융의 경우는 프로이트와는 다른 관점에서 무의식의 개념을 다룬 바 있다. 또한 행동주의 심리학의 초기에는 정신분석학이 클라이언트에 대한 심리적 접근에서 절대적으로 보다 효과적일 수 있는 근거는 찾을 수 없었다는 맥락의 보고를 한 바 있다. 그러나 많은 심리학자는 프로이트가 개척한 인간의 무의식 영역과 본능에 대한 깊은 이해의 결과물들이 논리적이지 않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는데에도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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