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상담과 우생학
우생학에 대한 비판이 거세어지면서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우생학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1930년대 영미의 생물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영국의 홀대인, 헉슬리, 혹 벤 그리고 미국의 제닝스가 대표적 인물들이다. 이들은 우생학에 대한 사회적 비판을 불식하기 위해 무엇보다 우생학으로부터 인종, 계급, 남녀와 관련한 사회적 편견을 제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아가 건강한 우생학은 인간유전학에 과학적 기초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움직임의 결과 정부의 강제적 수단에 의해 집단적인 인종 개량을 추구했던 우생학에서 개인의 자발적 상담을 통해 출산과 관련한 유전질환 문제의 해결을 모색하는 유전상담으로의 이행이 이루어지게 된다. 유전질환 퇴치를 목적으로 하는 오늘날의 인간유전학은 이러한 움직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유전상담은 1940년대 영국의 소아병원과 미국의 미시간대학, 미네소타대학에 전문 클리닉이 설치되면서 시작되었다. 인간유전학과 우생학의 연관은 1948년 창설된 미국 의료유전학회의 초기 회장 다섯 사람 중 네 사람이 미국 우생학회의 이사였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1947년 "유전상담"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했으며 미네소타대학의 다이트 인간 유전학연구소 소장이었던 셸턴 리드는 "인간유전학 상담은 우생학 프로그램을 현대적으로 시행하는 방법이다. 우생학이란 용어는 버림받았으며 이제 '인간유전학 상담'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고 했다. 우생학이란 용어는 버림받았지만 우생학으로부터 직접 기원했다는 맥락에서 1960년대 대다수의 의료유전학자는 유전상담을 비롯한 자신들의 작업을 우생학의 한 형태라고 주저 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유전상담을 우생학의 연장이라고 단순히 규정하기는 힘들다. 대상, 목표, 수단, 결과에 있어 많은 상이점을 보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우생학은 개인에 앞서 사회 전반의 이해를 도모한다. 반면 유전상담은 개인과 그 가족의 이해를 우선한다. 따라서 그 동기와 목적에 있어 양자는 구별된다. 또한 우생학이 정부의 개입에 의한 강제성을 동반한다면 유전상담은 개인의 자발적 참여에 의한 자율적 의사결정에 바탕을 둔다. 따라서 시행 수단에 있어서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유전상담을 이끈 사람들이 궁극적으로는 개인을 통한 사회의 유전적 특질을 개량하고자 하는 우생학적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결과는 종종 정반대의 열생학적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유전적으로 결함이 있는 아기를 낳았을 경우 부모는 더 많은 아이를 낳음으로써 이를 보상하려는 성향을 보편적으로 보인다. 이러한 질환을 가진 아이가 다시 태어날 확률이 비교적 낮다는 것을 유전상담을 통해 부모가 알게 되면 그 부모는 실제 더 많은 아이를 낳게 되고 따라서 당대에 발현되지 않는 잠재적 결함 유전자를 지닌 아이가 더 많이 태어남으로써 결과적으로 유전상담은 열생학적 효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이외에도 우생론자들은 신체적 특질보다는 정신적 특질을 더 중요시하였는데 이를 전제로 한 유전상담은 부분적으로 열생학적 효과를 나타낸다. 예를 들어 상담원들은 신체적인 유전질환에 대해 유전상담을 요청한 부모들이 대개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책임감이 강하며 교육 수준이 높은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상담원들은 문제의 유전질환이 지나치게 심각한 경우가 아니면 이들 부모의 우수한 정신적 특질의 가치가 유전적 신체 결함을 상쇄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하여 이들에게 자녀를 낳을 것을 권유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 유전상담은 정신적 특질에 대해서는 우생학적일지 모르나 신체적 유전질환에 대해서는 열생학적인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초기의 유전상담은 부모의 가시적인 유전질환에 대한 정보를 기초로 실시되었으나 유전질환을 직접 치료할 수 있는 길이 열림에 따라 인간유전학은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페닐케톤뇨증은 유아기 지능발달에 심각한 장애를 가져오는 유전질환으로 알려졌는데 불임 등 기존의 우생학적 방법 외에는 별다른 치료, 검사 방법이 없었다. 1950년대 필수 아미노산의 일종인 페닐알라닌의 과도한 혈중농도가 PKU의 발병 원인으로 밝혀짐에 따라 이를 저 페닐알라닌 식이요법으로 치료하는 법이 개발되어 유전질환을 직접 치료하는 길이 처음으로 열리게 되었다. 이러한 유전질환 치료법은 결함 유전자 자체를 정상 유전자로 치환하는 1990년대의 유전자치료와는 다르다. 이어서 1960년 싸고 간편한 혈액 검사법을 통해 PKU를 검사하는 방법이 개발되었고 PKU를 포함한 몇 가지 유전질환에 대한 신생아 검사는 1960년대를 통해 구미 각국에 급속히 확산하여 출산과 관련한 일상적인 검사과정으로 정착되었다. 1940년대에서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새로운 흐름 속에서 대부분의 유전학자는 유전학의 의학적 응용을 우생학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표현하는 데 거부감이 없었다. 물론 이들은 과거의 우생학이 인종과 계급적 편견에 물들어 있으며 지나치게 단순한 과학적 전제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했고 또한 이를 시정해야 한다고 믿었으나, 동시에 힘써 지켜야 할 우생학도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무도병이나 테이 삭스 병(Tay-Sachs, 흑내장 가족성 백치) 등 당사자와 사회에 과도한 고통과 비용을 부과하는 고질적 유전질환은 반드시 제거해야 하며 이러한 의료적 우생학은 소수 인종이나 종교, 가난한 자를 대상으로 한 과거의 우생학적 정책과는 구별하여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이들 중 소수이기는 하지만 우생학을 보다 심각하게 반대한 일부 유전학자들은 우생학이란 이름 자체를 사용하기를 거부했다. 1954년 라이어 널 펜로즈는 당시 세계적인 우생학 연구소였던 런던의 국립 갈 튼 우생학연구소의 소장을 맡으면서 기관지의 제목을 《우생학 연보》에서 《인간유전학 연보》로 바꾸었다. 또한 1961년에는 그가 맡고 있던 "갈튼 교수와"를 "갈튼 인간유전학교수좌"로 개칭했는데 우생학의 태두인 갈튼이 풍기는 우생학적 이미지를 희석하게 시키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개칭 과정은 인간유전학이란 분야 자체가 우생학으로부터 직접 기원했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미국의 유전학자들도 우생학이란 단어를 기피하는 추세에 동조하여 1950년 새로운 학회의 이름을 "미국 인간 유전학회"로 채택했고, 1954년 《미국 인간 유전학회지》를 창간했다. 우생학에 대한 일반 대중의 혐오감도 점점 커져 1960년대 말쯤이면 더 이상 우생학이란 단어를 미국 사회에서 용납하지 않는 정도에 이른다. 개혁을 통해 우생학을 지키려는 유전학자들의 움직임은 이러한 적대적 분위기 속에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급기야는 미국 우생학회마저 이러한 추세에 굴복하여, 1968년 기관학술지인 《계간 우생학》을 《사회생물학》으로 개칭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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